10. 하나님의 자녀로의 거듭남, 성령의 세례와 충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또, 성령으로 충만함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1. 먼저, 첫번째 질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12~13에서 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원어: 영접한 자: 과거시제),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bloods)으로나 육정(육신의 의지: will
of flesh)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태어난: were born: 과거시제) 자들이니라."
“But as many as received Him(Jesus), to them He(God)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to those who believe(is believing) in (into) His(Jesu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NKJV)
위의 말씀은, 두가지를 증거합니다. 첫째는,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현재)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위의 말씀에 사용된 단어들(동사)의 시제를 비교해 보면 그 사실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는 헬라어 원어를 보면, “(예수님을) 영접한(received: 영접했던) 자” 로서 시제가 “(단순) 과거” 입니다. 단순 과거시제는 과거에
한번 일어난 사건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따라서, 한글 성경에 기록된, “영접하는 자” 는, “(과거에) 이미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자들” 을 말합니다. 또, “그 이름(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 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그 이름을 믿고 있는(believing) 자들” 을 말합니다. 그 시제가 “현재 진행형” 입니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 자들” 은, “지금도 예수님을 계속 믿고 있는 자들” 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 은 "과거에 이미,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였고, 지금도 계속,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들” 을 말합니다.
그런데, “영접한 것” 은 과거 시제이고, “믿고 있는 것” 은 현재 진행형이므로, 시제만을 볼 때, “영접한 것” 이 “믿는 것” 보다 앞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믿는 것"이 "영접한 것" 보다 먼저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과 그리스도로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지금도 계속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셨다” 는 단어는, 그 시제가 "단순 과거"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볼 때, 우리가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고, 또 주님으로 영접했으며, 지금까지 줄곧,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슴을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새롭게 태어나게 해 주셔야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에 태어날 때, 영(spirit)이 죽어 있는 상태(우리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시에 주셨던 영이 아니라 마귀의 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는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엡 2:1). 그 상태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이 죽은 상태로 존재한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을지라도,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할 수 없기에, 원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고, 일생 동안 죄를 범하다가, 그 죄 값으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을 태어나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born again)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요 3:5). 그런데, 여기서 “물” 은 물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 말씀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물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라는 말은, “물, 곧(namely), 성령으로” 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물” 이 물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다시 태어나게) 하는 주체는 물세례가 아닙니다. 물세례는 우리의 영이 거듭나기 전에 받는 것이 아니고 거듭난 후에 받는 예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물”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체가 아닙니다. 그 주체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용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23은,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flesh: 육신을 의미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성령을 의미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말씀을 통하여)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용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8에서, “물과 성령으로 난” 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성령으로 난” 이라고 말씀한 것은, 물이 다른 것을 의미(예를 들어, 물세례 or 말씀)하지 않고, 성령을 의미하는 것을 시사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를 “물, 곧, 성령으로” 라고 해석하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습니다. 왜나하면, “과” 로 번역된 헬라어 접속사 “kai“ 는 “And” (…과 or 그리고) 이외에 “That
is, or Namely” (즉)의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사용 예: 빌 2:5).
우리의 영(spirit)이 성령(the
Holy Spirit)에 의해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born again)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이 태어나는 것" 을, "다시 태어난다" 는 말로 표현하셨고, 그 말을, 한글 성경에서는 “거듭남" 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태어나게 하신 결과입니다. 즉, 우리가 믿어서 거듭난 것이 아니고, 거듭났기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믿음은 거듭남의 원인이 아니고, 거듭남의 결과임). 우리가 믿은 것은,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때,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사이비 이단들의 속이는 말들과 거짓 이론들에 의해 속아 넘어가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복음을 듣는 가운데,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born again), 그 결과로서(그 즉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요 6:63; 약 1:18; 벧전 1:23).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복음(the
good news)을 듣지 않고서는 거듭날 수 없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0:17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고 증거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때에만 거듭날 수가 있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해서 구원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불신 영혼들에게 나아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서 그들도 구원받게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왜 우리에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태어나게 하신 것(거듭남)을 굳이
언급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무슨 목적으로 “거듭남” 을 언급한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지혜나, 행위나 공로에 의해서가 결코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영을 주셔서(겔 36:26)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사도바울도, 에베소서 2:8 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믿음: faith)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for)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and this (faith) not from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의 죽으심을 당하시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성령으로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셔서(거듭나게 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예수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여 구원받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우리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셔서 (그 즉시) 우리가 믿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듯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면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5:1 을 통해서도, 우리는 ‘거듭남과 믿음의
관계’ 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believing)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has
been born again) 자니...”;
이 말씀에 사용된 단어 “믿는” 은, 현재분사시제로서 지금 “믿고 있는(believing)”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서 난(born) 자마다” 에서 “난” 은 완료시제(Perfect tense: has been born again)로서, 완료시제는 과거에 하나의 사건이 완성되어 그 결과가 현재까지 줄곧 미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현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것은, 그들이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이미도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났기 때문임을 시사합니다. 즉, 우리가 과거 어느 한 시점에,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되었고, 지금도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 는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믿음과 영접보다 앞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제목: 로마서 10:10 의 올바른 번역과 그 의미: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 위에서, “믿어”의 한글 번역은 능동태(positive: 믿다)처럼 되어 있으나, 그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Greek)는 수동태임 (pisteu,etai) 직역하면, “믿게 되어” 임.
- 위에서, “시인하여”의 한글 번역은 능동태(positive: 시인하다)처럼 되어 있으나, 그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Greek)는 수동태임 (o`mologei/tai). 직역하면, “시인하게 되어” 임.
그런데, 로마서 10:9에는 위 두 단어들이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믿으면 (pisteu,sh|j)” , “시인하며(o`mologh,sh|j)”.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질문> 그러면, 로마서 10:9에서는, 두 단어들이 능동태로 되어 있는데, 로마서 10:10에서는, 왜 그 두 단어들이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9의 내용이 있슴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10:10에서 동일한 내용을 또다시 언급한 것일까요?
<답> 우리가 “믿는 것”과 “시인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게 되어져서 믿는 것이고, 우리가 시인하게 되어져서 시인한 것을 말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어지는 것과 우리가 시인되어지는 것은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 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거듭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거듭남이 믿음 뒤에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태어나야만 믿을
수가 있고, 그 결과로서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영적으로 먼저 거듭나야만
비로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의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야만 비로소 부모님을 부모님으로 믿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태어나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비록 먼저 올지라도, 거듭남과 믿음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남과 동시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직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인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했는가(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했는가), 아직 영접하지 않았는가를 보면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했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아직 영접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마 16:16-17; 요 1:12-13; 요일 5:1).
즉,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마음(heart)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고 그것을 입으로 시인했다면 우리는 거듭난 성도입니다(롬 10:9).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 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증인들은 예수님을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만 믿습니다. 무슬림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도 믿지 않고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만 믿습니다.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종교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만 믿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결코 참된 믿음이 아니기에 그들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올바로 믿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사이비 이단 종파의 하나인 ‘구원파(기쁜소식선교회: Good News Mission Church)’ 박옥수는, 그의 웹싸이트, 굳뉴스 데일리(Good news Daily)에서, “(정통 복음주의의) 거듭남에 대해 무지한 한국 교회”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 한국 개신교(정통 기독교)가 거듭남에 대해 무지하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그의 주장이야 말로, 그가 거듭남에 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 디엘 무디의 말: “인류는 타락하여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중생이 필요합니다.”(The Life & Theology of Moody, Chapter 5) 를 인용하여, “타락하고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고 의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야 된다.” 고 말을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맨 마지막에 가서는, 디엘 무디의 말과는 전혀 맞지 않게,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어야만 거듭난다(거듭남은 죄사함 이후에 온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고, 비성경적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가 먼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고, 구원 받을 수가 없슴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가 거듭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거듭남이 먼저이고 믿음은 다음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타락한 우리의 지혜나, 행위나 공로에 의해서가 결코 아니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먼저 거듭나게 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무한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 중에도, 거듭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못된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의인으로 다시 출생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위와 같은 잘못된 말을 하는 것일까요? 왜, 목회자들이 거듭남이 믿음 뒤에 온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거듭남은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로서, 그 자체를 눈으로 볼 수 없고, 그 결과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거듭남의 첫번째 결과입니다. 그 믿음은, 성령 하나님의 감추어진 (내적) 역사의 외적인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면, 우리가 거듭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점진적으로) 삶의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신앙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자백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래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또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63-65: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전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 제자 중에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그는 가룟 유다임). 예수님은, 그것을 두고,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면 누구도 올 수 없다는 말씀을 또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면 누구도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버지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먼저 거듭나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먼저 거듭나게 하셔야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을 되돌려서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어야만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것은 무능한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위배되며, 거짓 주장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거듭남의 원인이 결코 아니고 거듭남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믿어야만 거듭날 수 있다고 오해한다면, 그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삶에서 어려움과 환난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진짜가 아니라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될 수 밖에 없고, 그와
같이,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같이, (구원받기 위해), 율법적인 생활에 얽매이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고, 남들에게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믿음으로 기도할 수 없고, 믿음의 역사(예, 기도의 응답, 치유, 기적등)를 경험할 수 없고, 극단적인 경우엔, 이단과 세상 종교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 큰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남의 진리를 확실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우리가 거듭나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믿고나서 거듭나게 되었다고 오해하는 이유는, 거듭남을 세례와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혼동은, 제칠 안식교의 손계문 목사와 같이, "거듭남" 과 "세례"
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일부 목회자들의 잘못된 말을 통해 야기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이단인, 제칠 안식교의 손계문 목사는
그의 유튜브 “성서연구원” 에서, 개신교 목사들이 거듭남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거듭남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언급하신 “거듭남” 에 관한 말씀을 바로 알지 못했기에, “거듭남” 을 “세례” 에 무리하게 연관시켜 잘못된
말을 하고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세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거듭남” 은 마귀의 자녀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탄생된 사건으로서, 우리의 영적
신분의 변화(새로운 탄생)을 가리키지만, "세례" 는, 이미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된 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또하나의 영적 사건입니다.
세례(baptism)는 구약 시대의 할례(circumcision)와 같습니다. 로마서 4:11을 보면, 아브라함이 언제 할례를 받았는가를 증거합니다: "그가(아브라함)
할례의 표(sign)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righteousness)를 인친 것이니(seal)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그가 할례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거듭남이 먼저이고 세례는
그 다음 사건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적 신분의 변화(새로운 탄생)이지만,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진실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 받아야 만하는 또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거듭남과 세례는 엄밀하게 구분된 일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 즉, ‘나는 죄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서만 산 자입니다’ 라고 선포합니다(롬 6:1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기 위해서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듭났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 즉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 그 후, 물세례를 받을 때, “나는 죄에 대해
죽었고, 의에 대해서 살았으니, 나는 더 이상 죄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고, 의에 대해서만 반응하겠습니다” 라고, 하나님과 교회 앞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과 세례는 비록 서로간에
직접 연관된 일일지라도, 성격이 엄밀히 다른 일임으로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났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세례도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해하여, 우리가 믿어야만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러가지 큰 부작용을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형통할 때엔 내가
거듭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가 불통할 때엔, (사탄의 궤계에 속아), ‘나의 믿음이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거듭나지 못해서 그런 불행을 경험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율법주의에 빠지거나, 사이비 이단들에 의해 속아 넘어 가 큰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거듭남에
대해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해 결코 현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거듭남의 진리를
확실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우리의 지식과 지혜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으로 부르셔서, 우리가
복음을 듣는 중에, 우리의 영(spirit)을 거듭나게 하사,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육신: flesh)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하나님의 씨: 성령을 말함: 요 3:5-6: 거듭남은 성령으로 이루어짐)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영어
번역): “For you have been born again, not from
perishable seed, but from imperishable (seed), through the
living and enduring word of God.”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썩어질 씨로부터가 아니고, 썩지
않을 씨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거듭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르셔서,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을 사용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는 말인 줄 믿습니다. 즉, 우리가 뭔가를 해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을 듣는 중에,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로 인하여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셨고, 그 즉시로, 우리가 마음(heart)을 열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 것은 결코 우리의 지혜나 경험이나 공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의 영(spirit)이 성령(the
Holy Spirit)으로 말미암아 거듭났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죽은 상태여서, 그런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엡 2:1-5; 고전 2:13-14). 그것은 육신적인 이치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후에야 비로소 부모를
부모로 믿는 것입니다. 태어나지 않고서는 결코 부모를 알 수가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르시고,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셨고, 그 결과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갈 3:26).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성경 원어(헬라어)를 보면, 위의 말씀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6 에서 증거합니다: “너희가 아들(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사(sent: 과거시제임) (우리로 하여금)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위 말씀의 원어(헬라어)를 직역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양자들)이므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의 마음(hearts) 속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말함)을 보내 주셨다" 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3:26과 갈라디아서 4:6의 말씀을 종합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5 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두려움을 주는 마귀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the Spirit of adoption: sonship: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받았으므로(received: 과거시제) 우리가(너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위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된 것은 우리가 (과거 어느 시점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연하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두가지 말씀을 볼 때, 이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부르짖을 수)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부르짖는) 첫째 이유는(기본적인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르실 때, 우리가
그 복음의 말씀을 듣고(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심)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갈 3:26).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부르짖는) 둘째 이유는(객관적 이유),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롬 8:15).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더욱 확실한 이유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위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로운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자신의 구원의 문제로 인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를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영적으로 거듭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다시) 그의 어머니의 태(womb)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는가(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5-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 육(the flesh: 육신)으로 난 것은 육(flesh: 육신)이요 (그) 영(the Spirit: 하나님의 성령)으로 난 것은 영(spirit: 사람의 거듭난 영)이니." 이 말씀은 육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아 육신(the flesh)으로 태어났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거듭난다는 말은,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이래로(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에 아담에게 주셨던 최초의 영(spirit)이 없이 육신으로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에,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거듭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르셔서,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가게 된 줄 믿습니다.
<주의 사항>: “거듭남과 믿음의 관계 이해”
어떤 사람들은, 거듭남이 믿음의 결과인 것처럼 생각하고, 심지어, 그 믿음을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듯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면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실제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 아무리 크고 놀라운 일일지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먼저 거듭나게 하셨고 그 결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서 거듭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거듭났기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거듭남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거듭남과 회심(conversion: 믿음과 회개)은 구별할 수 있지만 분리될 수 없습니다. 거듭남이 먼저 와야 하지만 회심은 즉시 그 결과로 옵니다. 즉, 거듭남과 회심은 항상 함께 합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은 신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결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참조>: 다음 링크의 글, "거듭남과 믿음의 관계"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링크를 클릭하시고 상단의 다운로드 표시를 한번 더 누르시면 글을 바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9QYU1ITjh56H0_JSMcAfTmJ7QSEbs_Ce/view?usp=sharing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29-30 에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녀들 중에, “육체(그 육신: the Flesh)를 따라 난 자” 와 “성령(the Spirit)을 따라 난 자” 를 비교하며, 누가 하나님의 유업을 얻는가를 말합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자신의 타락한 육신(Flesh)의 생각을 좇아 낳았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었지만,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따라 난 자이기에, 이삭은 하나님의 유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갈 4:28). 사도 바울은, 로마서 9:7-8 에서 그 내용을 다시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의 씨(seed)가 다 그의 자녀가(자녀들: children)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창 21:12), 곧 육신(Flesh)의 자녀가(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자녀들이) 아니고, 오직 약속의 자녀가(자녀들이)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이스마엘은 비록 아브라함으로부터 태어났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 없이, 아브라함이 그의 육신(Flesh)을 좇아 (여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낳은 아들이었기에, 이스마엘과 그로부터 난 자들은 아브라함의 씨라 불릴 수 없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이 그의 육신을 좇아 낳은 것이 아니고, (그가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낳은 아들이었기에, 그와 그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씨로 여김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육신적인 힘으로 된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삭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기에, 이삭은 오직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것입니다(창 18:14).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삭을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인간의 타락한 육신을 따라 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성령으로 낳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기업(천국)을 상속받게 된 자녀를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난 것’ 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 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그 두가지는, 서로 다른 말이 아니고
실상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천국의 유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이나 뜻이나 지혜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오직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성취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에 힘입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사람들을 미리 택하시고 때가 되어 택한 사람들을 불러 주셨습니다(엡 1:4). 구약시대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와 언약을 체결하셨고(창 17:7), 그에게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주셨고, 또 이삭에게 (에서와) 야곱을 주셨고, 야곱에게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주셔서, (택한 자들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신약시대부터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에서부터 사람들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다” 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요 3:5). 인간 스스로는 결단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 그런데, 이 시점에서 우리가 꼭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고) 거듭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신약시대의 예수님의 제자들(사도행전 이전의 시기)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후에, 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순종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풍조와 욕심을 따라 죄를 범하며 살아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좇아 다니면서도 개인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고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시기에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으며,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3년반 동안 풀타임으로 강도높게 훈련을 받은 그들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연약하고 무능력한 모습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져 보기도 했지만, 제자의 삶을 살아내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을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믿었슴에도 불구하고, 아직,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자녀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이유로 그토록 나약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비록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눅 10:20; 요 3:5-8; 마 16:15-19), 아직 성령으로 세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유지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성령을 따라 살 수 없기에(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순종하지도 못함),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없고, 사탄의 유혹과 궤계를 이겨낼 수가 없으며, 죄를 범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엡 5:18; 롬 8:4, 13-14; 갈 5:16-17). 성령의 역할은 그만큼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건>과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의 <성령세례>의 차이점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는 분명 성령의 역사이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일이고, 결과에 있어서도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 가신 후에, 제자들에게 변화의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것처럼(행 1:4-5, 8), 오순절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셨습니다(행 2:1-4). 그것은, 제자들이 경험한 최초의 성령충만입니다(행 1:8, 2:4). 그때 그들에게 외적으로 나타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배우지 않은 다른 언어(방언)로 말을 하기 시작한 일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들이 방언을 말한 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외적인 증거(initial evidence)입니다(요엘 2:28; 막 16:17; 행 2:4, 10:46, 19:6).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입니다(욜 2:28; 행 2:17; 막 16:17). 우리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면 맨 처음에 그와 같이 방언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2. "성령으로 거듭남" 과 “물 세례” 와 "성령 세례" 의 차이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즉, 거듭남과
성령세례를 동일시 합니다. 그러나, 거듭남과 성령 세례는 엄연히 다른 사건입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영이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탄생하여(영이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의미하고, 세례(baptism)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고 주님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제정하신 영적 예식이기에 두가지는 엄연히 다릅니다.
세례에는 물 세례와 성령 세례가 있습니다. 물 세례는 교회의 (안수 받은) 목회자 (ordained minister)가 집례하는 예식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결단할 때, 그의 몸을 물에 완전히 잠궜다가 다시 물 밖으로 들어 올림으로써 세례를 줍니다(약식으로, 물을 그 사람의 머리에 적시거나 뿌림). 물세례는,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죄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에 대해서만 산 자임’ 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선포하고 그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단하는 예식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물세례와 다릅니다. 물 세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결단하는 의식이지만, 성령 세례는 그 결단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실질적인 수단이고 성령의 능력을 받는 통로입니다(성령 세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결단과 각오를 실행하고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 세례는 목회자가 예식을
집례해야만 받을 수 있지만,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직접 주셔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만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마
3:11; 요 1:33; 막 1:8).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마음(heart) 안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성령의 내주가 이루어지며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과 늘 함께
하시며(임마누엘) 그들을 친히 인도하시기 위해 주시는 선물입니다(고후 1:22; 갈 4:6; 엡
3:17). 그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예수님을 주님(the Lord: 머리)으로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교회가 하나가 되어,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선택사항이 아니고 필수입니다.
요약하면, 거듭남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진 사건이고, 목회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 물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직접 주셔야만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의롭다함을 받은(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행 2:38-39). 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이상 자신의
타락한 육신의 생각과 뜻과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날마다 성화를 이루어 가며(거룩한 삶을 살아 갊), 예수님을 전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처럼, ‘성령으로 거듭남’ 과 ‘물 세례’ 와 ‘성령 세례’ 는 서로 다른 사건입니다.
<참조> 도표. “인류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원의 전개”: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3DbA-f-b9txdsixuR0eGSVtpsbsju44l/view?usp=sharing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남’ 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 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8:9에서 증거한 말씀으로 인함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영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성령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 말씀(한글 번역본)을 읽으면, 이 말씀은,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아서, 성령이 우리 안에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원어(헬라어)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9의 원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육신(flesh) 안에 있지 않고 영(spirit) 안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의(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다.” (영어 번역: “But you are not in the
flesh but in spirit, since the Spirit of God dwells in you. Now if anyone does
not have the Spirit of Christ, he is not His.”). (원어를 직역한) 영어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이 글의 수신자들(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성령이 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그들 안에 성령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에게 성령을 따라 살라고 말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너희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너희가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참고: 고후 13:5), 더 이상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오직 성령을 따라 살라.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 살라.’ (롬 8:13-14; 8:4).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작성할 때에,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로 간주하여,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여길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로마 교회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로마에서 온 그의 동역자들로부터(예, 브리스길라, 아굴라),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기본적으로, 그 당시엔, 누군가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는 연이어, 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나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교회들에게 서신서들을 작성할 때에는,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배경을 바로 알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오해하지 않고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로마서 8:9 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고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주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성령이 그 옆에 함께 하는 사람이고 법적으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고, 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그들 안에 이미 성령이 내주해 계심으로,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실질적으로 한 몸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이 더이상 자신의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만 한다는 취지로 그 말씀을 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남” 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 은 엄밀히 구분된 일이기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분명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복이 있다” 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마 16:16-17).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그가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그의 다른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요 15:3-4), 그들이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입증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만으로는, 아직,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고백을 하였고,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사역을 막고자 했고(마 16:22-22), 세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마 26:70-74). 그것은, 그가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관계로, 영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생각을 따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길 작정하셨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 목적은, 우리들이, 더 이상 우리의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성령을 따라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6-17 에서 성령 세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성령을 가리킴)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성령이 지금, 제자들과 함께(헬라어 'para': beside) 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성령이 현재, 그들 '옆에’ 임재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장차 제자들을 떠나면,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인데,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그들
속에(그들 안에) 거하실 것이고, 영원토록 함께 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은, 성령이 옆에 계시는 수준이
아니라, 제자들 속에 들어가셔서 영원토록 내주하실
것을 말하는 것임). 그것은, 성령 세례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한 상태에서는, 아직, 우리 옆에만(beside) 계시지만,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엔 성령이 비로소 우리 안에(속에) 들어 오셔서 내주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8:9과 요한복음 14:17의 말씀을 서로 비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한 상태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의문을 제거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게 됩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엄연히 다른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로마서 8:9 말씀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아직 구원받지 못했슴) 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 말씀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기본이고, 그것이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길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 믿습니다. 즉,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이기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예수님의 말씀만을 좇아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롬 8:13-14; 8:4).
로마서 8:14을 보면 사도바울이 말씀을 진술할 때 왜 신학적 논리에 의거하여 진술하기 보다는 가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말씀을 진술하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Nkj) "For as many as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these are sons of God."
위의 진술은,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위의 진술을 거꾸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 살지 않고,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처럼 생각이 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그 영이 거듭난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 1:12; 요일 5:1).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그와 같이 신학적으로 논쟁이 될 수 있는 진술을 한 것일까요? 그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의도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즉, 그는, 누군가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과거의 구원받지 못했을 때와 같이 여전히 육신의 소욕을 좇아 죄를 범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기에, 그가 반드시 그런 목표의식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단언한 줄 믿습니다. 로마서 8:9도 그런 차원에서 선언한 줄 믿습니다. 즉, 로마서 8:9은, 누가 그리스도인인가를 정의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그들 안에 성령이 내주해 계시니, 그들은 더이상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닌 것이 확실함으로, 더이상 육신을 좇지 말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살라고 말하기 위해 그런 진술을 한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37-39 에서 믿는 자들은, 성경에서 증거한 것처럼, 장차, 성령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원어 직역: 내게로 오게 하고 마시게 하라).
(38) 나를(예수님을) 믿는(believing into)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
배에서(from the belly: heart을 의미함) 생수의 강(living water)이 흘러나오리라 (39) 이는 그를(예수님)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이 그 당시엔,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이전 시점임으로, 성령이 아직 그들 속에 임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임).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기본적인 일로 계획하셨고 그 일을 추진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기
이전, 즉, 오순절 이전의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오순절 이전에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그리스도)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요 17:8-9; 마 16:16-17; 눅
10:20). 그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이 임하여 비로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엄연히 다른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일은 우리의 영(spirit)이 새롭게 태어난 사건으로서, 우리의 영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아주 신비롭게 벌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외적으로 자각하지 못하지만(unconscious),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은 우리가 분명히 의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엔, 우리의 마음(heart)에, 성령이 충만히 부어져서 밖으로 흘러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외적인 증거가 명백히 나타납니다. 120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이 이르러,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행
2:4).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증거가 있습니다. 그들은, 즉시, 방언들을 말하고, 예언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행 2:4; 10:46; 19:6).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경험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이미도 요엘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사도행전 2:17-21(요엘 2:28-32): "....말세(in the last days)에 내가 내 영(Spirit: 성령: the Holy Spirit)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pour out)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 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Spirit)을 내
남종과 내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pour out)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위의 말씀을 볼 때,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세례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임한 사건이 결코 아니고, 성령을 받은 당사자나, 그 주변 사람들이 외적으로 분명히 알아 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을 부어 준다" 는 말은, 단순히 성령을 조금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을 붓듯이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완전히 적시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도행전 2:4 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filled with the Holy Spirit)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세례가 최초의 성령충만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2:4 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는 말씀과, 에베소서 5:18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는 말씀을 서로 구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4 에서,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것은 그들이, 최초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나타난 결과이고, 에베소서 5:18 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은, 성도들이 삶 가운데, 성화(sanctification)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유지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에베소 교회에게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 일입니다. 성령세례 후에 성령충만이 오기 때문입니다.
<제목: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 세례가 필요한 이유 (요약)>: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하루 앞둔 시점에, 자기가 (유월절에 대속의 죽음을 당하고, 삼일만에 부활해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것을 아시고(요 13:1),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면, 그들을 위해 거처(Place)를 예비한 후에, 다시 와서 그들을 영접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3).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6-20: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라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모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위 말씀에서 우리가 세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기가 부활하신 것을 보여 주실 것이다(v.19).
2) 예수님이 승천하여 아버지께로 가면,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v.16-17).
3)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이 그들 안에 거하심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v.20).
위 내용은 성령 세례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하신 대로 유월절에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죄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자신이 그리스도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고, 40일간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몸소 나타나셔서 그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고, 승천하신 후에, 열흘 째가 되는 오순절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1-2장).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실 것을 전제로 하여 미리 다음과 같이말씀하셨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그는)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슴이라.”
위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예수님 안에 거하고, 또,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거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예, 갈 5:22-23의 9가지 열매). 그래서, 위 말씀은, 성령 세례의 목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세례가 얼마나 중대하고 필수적인 것인지를 깨닫고, 반드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하며 거룩한 열매를 맺어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만 합니다(요 15:8).
<질문>: “예수님이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조적으로 성령을 받을 수 없었고,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성령세례를 받았지만(요 7:39), 지금은 오순절 이후의 시대임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자동적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위 질문은, “성령으로 거듭난 것” 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두가지 사건이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사건일까요?
<대답>: "성령으로 거듭난 사건"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은 서로 다른 사건입니다.
두가지 사건이 서로 다른 사건인 이유를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두 사건의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의화(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동행하며 성화(Sanctification)를 이루어 가고 예수님의 증인의 사역을 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믿었고 깨끗함을 받은 성도들이었습니다(마 16:16-17; 요 15:3).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연약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이르러 그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건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건이 사로 다른 사건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두 사건이 서로 다른 사건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계속 나옵니다. 오순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 집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의롭다함을 받음). 그러나, 그들은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방문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고, 그들에게 안수를 함으로써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토록 핍박했던 사울도, 에베소의 신자들도 그리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그 후에 연이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 세례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요 14:17에서, 세상 사람(믿지 않는 사람)은 성령을 받을 수 없다(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슴)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한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거듭남과 성령세례는 서로 분리된 두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는, 성령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법적으로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예수님과 연합하기 위함입니다.
법적인 연합은 거듭남(새 영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실질적인 연합은 성령세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법적인 연합은 혼인신고와 같은 것이라면, 실질적인 연합은 함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동행하며 성화를 이루어 가고(빌 2:12),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갈 2:20; 요일 3:24; 요일 4:13; 요 17:21; 행 1:8).
2)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성령으로 거듭난 사건)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성령님을 영접하는 것)이 서로 다른 사건인 이유는, 하나님이 삼위 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아버지와 아들(예수님)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예수님)과 성령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세분은 다른 인격체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면, 우리는 아들(예수님)을 영접해야 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우리는 또한, 성령님을 영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을 영접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연이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요 20:22).
<결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영접했다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많은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믿는 자들로 하여금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절차를 이미 완료하셨고, 우리는 오순절의 성령강림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심으로 간구함으로써 (눅 11:13; 행 1:14) 성령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늘 동행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혼의 성화를 이루어 가고 또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람의 영"과 "성령"의 관계: 아래의 그림 위를 한번 클릭하시면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제목: (위 그림에서) “사람의 영”과 “성령”의 관계 설명:
1번. "아담의 타락전" (창 2:7) : 아담이 하나님의 생기로 인하여 영을 받음(잠 20:27).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함.
2번. "아담의 타락후" (창 3:6; 2:17) : 아담의 영이 죽음 (영의 기능이 중단), 악한 영이 들어옴. 우리가 아담으로 인하여 태어날 때 죄성(악한 영)을 받음. 마귀의 자식(요 8:44). 인간이 마귀(악한 영)의 지배를 받아 죄를 범하며 살게 됨.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
3번. “우리의 영이 거듭날 때” (요 3:6; 1:12-13; 요일 5:1; 벧전 1:23; 약 1:18):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영이 거듭남 (but, 논리적 순서: 우리가 새 영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됨). 새 사람, 새 피조물(엡 4:24; 고후 5:17). 새 영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갈 3:26),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없슴. 성령이 아직 우리의 영안에 들어오기 전의 상태이므로 우리의 신앙은 혼적일 수 밖에 없고 불완전하다.
*주의 사항: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는데, 그 생기는, 성령이 아니고, 사람의 영이다(생기: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최초의 영임). 그 생기의 히브리어 원어는 네샤마흐(Neshamah)이다. 그 단어는, 잠언 20:27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영어성경은 그 단어를 “사람의 영”(the spirit of a man)이라고 기록했다. 그것을 보면, 창 2:7의 생기는 성령이 아니고, 사람의 영임을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예수 믿을 때 받게 되는 새 영은 성령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영이 거듭난 것(그 결과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됨)을 마치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엄밀히 다른 사건이다. 그것은, 에스겔 36:26-27에서 하나님께서, “새 영(사람의 거듭난 영)”과 “내 영(하나님의 성령)”을 분명히 구분하여 말씀하신 이유이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4번.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행 2:4; 8:17; 9:17; 19:6; 고전 2:12; 12:13; 갈 3:2, 5; 엡 1:13; 골 2:11): 성령이 우리의 영 안에 들어와 내주를 시작함(요 14:16-17; 최초의 성령충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심(갈 2:20; 골 1:27; 요일 4:13; 3:24; 엡 3:17). 예수님과 실질적으로 연합. 우리의 신앙은 영적이다.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됨(갈 4:6; 롬 8:16).
5번. “우리가 성령의 불을 소멸할 때” (살전 5:19):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고, 우리의 뜻대로 삶으로써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엡 4:30) 성령의 불을 꺼뜨림(성령의 역사가 없슴); 이 상태는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다(사례: 고린도 교회: 고전 3:1-3)
6번.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 (엡 5:18):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게 됨(우리가 늘 믿음으로 예수님과 동행). 성령의 역사가 나타남.
3. "예수 믿고 교인(church member)이 된 것" 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을 동일시하는 문제의 원인
예수 믿고, 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성경 구절이 있는데, 바로 고린도전서 12장 3절과 13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accursed: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the
Lord)시라 할 수 없느니라.”
위 말씀은, 어느 누구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예수님을 주님(the Lord) 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 우리가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주님이라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할 수 있슴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 연이어 (추가적으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2:13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것과 성령 세례를 동일시합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위 말씀만을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나 목회자들, 성도들)은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으면,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이 서신서의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는 주장이기에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서신(letter)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서신으로서, 그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은 후에,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기에 사도 바울이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만,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아니고, 또, 그들처럼, 100%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이 시대의 교회는, 사도 바울이 목회한 교회들의 상황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작성한, 고린도전,후서와, 에베소서와, 다른 서신서들은, 기본적으로, 이미도, 예수 믿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작성된 서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2:13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 믿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결코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예수 믿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엄연히 구분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부활 승천 후, 오순절에 보내주실 성령에 대해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49: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사도행전 1:4-5: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
120 여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하여 함께 마음을 같이 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행 1:14-15). 그들은 오순절 날이 이르러, 바람 같이 불같이 그들에게 임하신 성령을 받고(성령세례: 최초의 성령충만) 예루살렘으로부터 증인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행 2:1-4). 그들은 믿고 난 후 한참 시간이 경과된 후에야(약 3 년반) 비로소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곧장 성령을 받지 못했을까요? 과도기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요 7:39).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와 동시에 자동적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순절이 지난 후에(예수님이 십자가 사역과 부활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 이후에) 믿는 자들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교회가 하나의 좋은 사례입니다. 사마리아교회는, 오순절(성령강림절)이 훨씬 지난 이후의 시점임에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고, 사도들의 안수에 의해서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즉, 그들은, 믿을 때 곧장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고, 믿은 후, 여전히 시간이
경과한 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가정의 사례를 인용하여, “그들은 믿을
때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고넬료
가정은, 베드로 사도가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이 성령세례는
아닙니다. 그 두가지는 서로 분리된 사건입니다. 성령세례는, 영(spirit)이 거듭나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추가적인 선물입니다(행 2:38). 고넬료 가정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특별한 사례입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한 후에, 성령 세례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인식하고, 성령을 사모하여 간절히 구할 때, 성령을 부어 주시지만(행
1:14; 2:1-4), 고넬료 가정은, 성령을 구하지 않았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사례들은 무엇을 증거합니까?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은 서로 구분된
일임을 증거합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은, 연이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4.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 꼭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었다면, 앞에서 이미 충분히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고, 우리는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는, 우리를 거듭나게 해서(성령님이 죽었던 우리의 영을 살리심),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the Lord)으로 영접함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아서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righteousness)가 믿는 우리에게 전가되어져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법적인 측면에서만 그렇게 된 것이지,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해져서 된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은,
삶속에서 실질적으로 의로워져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거듭난 상태로만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오순절 이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험했던 실패보다 더 큰 실패를 경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3년반 동안 풀타임으로
함께 하며 많은 가르침을 직접 배운 제자들이 실패했다면, 우리는
오죽이나 더 실패하겠습니까? 우리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큰 실수를 하고 더 큰 실패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만으로는, 우리는 결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할 것이고, 불신 세상과 마귀를 이기지 못하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믿고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우리의 주인행세를 하며 우리의 육신의 소욕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을 그대로 방치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명실 공히 하나님처럼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1:15-16; 살전 4:3).
그러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초보자"인 우리들을 어떻게 그토록 담대하게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하실까요? 어떻게 우리의 인격과 성품과 삶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만드실 수 있을까요(성화)?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능력을 받아, 성화를 이루어 가며,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행 1:8).
하나님은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거듭남을 의미함)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성령)을 너희 속에 두어(성령세례를 의미함)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율례를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은 예언하신대로, 말세에 이르러(말세: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다시 오실 때까지),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고(오순절의 성령강림), 지금도 그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욥 2:28; 행 2:33).
그러나, 우리가 오늘 당장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해도,
우리가 하루 아침에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보장은 없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후에, 여러가지 은사들이 부족함이 없이 나타났지만(고전 1:7), 도덕적으로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과 같고,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고전 3:1). 그러면, 왜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슴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자들로 남아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첫번째 결과는 성령이 임한 외적인
증거들(예, 방언이나 예언이나 찬양등)이지 성령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경과되면서, 성화의 과정을 거치고, 영적으로 성장한 후에, 순종을 통해,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 꾸준히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서, 성화를 이루어 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the savior)로 영접한 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성령의 역할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의 인도자이시고 교사이며 돕는 분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여 우리의 원수 마귀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고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은사들을 받고, 우리의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병을 고치고,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되면,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생각(mind)이 변화를 받아 우리의 육신의 소욕(인간적인 욕망과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수가 있습니다. 더욱 더 중요한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이상 우리의 주인행세를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heart)에, 주님(the Lord)으로, 왕(the King)으로 모시고, 늘 주님의 임재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그처럼 중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반드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5. 우리가 어떻게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선물로 받는지에 대해 선포하였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이 말씀은 두가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성령을 받는 일입니다(성령세례). 그래서,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두가지를 선물하십니다. 첫째는 예수님이고, 둘째는 성령님이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선물을 받는 것은 동일한 사건이 아니고, 서로 다른 구분된 사건이고, 첫째 사건(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일)이 완성이 된 사람에게만 둘째 사건(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이 이루어 질 수 있슴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해야만 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믿어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해야만 합니다. 그런 후에,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요 7:39).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행 2:33; 요 1:33).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한 것과 성령세례를 받는 일이 동일한 일이 아니고 서로 구분된 일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9:2에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갔을 때 그곳의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말씀에 사용된 단어, "믿는 일" 과 "성령을 받는 것" 은 시제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믿을 때에서 "믿는 일" 은 과거분사시제이고, "성령을 받은 것" 은 단순과거시제입니다. 과거분사는 과거에 진행중이던 어떤 일을 표현할 때 쓰는 시제이고, 단순과거는 과거에 일어났던 한번의 사건을 표현할 때 쓰는 시제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의 질문은, 에베소의 신자들이 과거에 (예수님을) 믿고 있던 중에, 성령을 받았는가? 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믿는 것" 과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 이 서로 다른 별개의 일로서 시점의 차이가 있슴을 시사합니다.
위의 원칙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것과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며, 성령의 세례를 받는 일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 (그것과 연결하여) 연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연이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세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첫째는,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의 120명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행 1:14). 그들은 성령세례를 주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고 성령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약속을 믿고, 간절히 사모함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심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전심으로 기도하는 일은 평범한 기도가 아닙니다. 나의 무능함을 철저히 인정하고, 내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절대 안된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하여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눅 11:8). 그런데,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할
때에는, 죄의
회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or 필수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의지해서 회개하고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행 2:38).
2) 안수를 통해서 입니다.
오순절이 지난 후에, 전도자 빌립에 의해 전도를 받고 세워진 사마리아 교회는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소식을 듣고, 그곳에 내려 갑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를 해 주자, 그들은 곧장 성령을 받았습니다(행 8:17). 에베소교회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행 19:2).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그들이 믿을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는데, 그들은 아무도 성령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이 믿자, 그들에게 물세례를 주었고, 안수를 하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그들은 방언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세례를 베풀 수 있는 목회자(or
사역자)로부터 안수를 받으면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입니다.
고넬료 가정의 사례를 보면, 고넬료는 사도 베드로를 초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는데, 그들이 복음을 들을 때, 오순절 때와 같이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행 10:44-47).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성령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그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들을 때 큰 은혜를 받는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심으로(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고 아멘으로 화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은 우리가 무엇을 해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반드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분명히 깨닫고(주목적: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게 됨으로써,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함임), 믿음으로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일입니다. 그 일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 주님이 주님의 뜻대로 우리에게 값없이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 와 "성령 충만" 은 다릅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가 간절히 구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일방적인 선물이지만(최초의 성령충만), 그 이후에 오는 성령 충만(처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성령으로 재충만을 받아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 것을 말함: refilled with the Holy Spirit)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순종함이 없이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5:18 에서,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라고 하신 말씀은,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말씀이 아니고,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고, 또,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날마다 성화(sanctification)를 이루어 나가야만 합니다(빌 2:12-13).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를 잘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6.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령 세례의 관계
성경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곧바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함을 증거합니다(요 20:22; 행 1:5; 행 19: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을 여전히 동일시 하거나,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성령의 세례는 분명 다른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분명 다른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를 알고 하나님을 믿는 분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일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 그리고,
성령의 세례를 받는 일 사이의 상호 관계를 좀더 쉽게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즉,
여러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 왜 연이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를 이해하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무엇과 같은 분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One God)이시나, 삼위(Three
Persons: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로 존재하신다” 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사람)로는 세 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한분이십니다. 세분이 한분이라는 말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 모순이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세분은 모두 똑같은 하나님의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시고, 한 하나님은 세분의 개별적인 인격체(사람)로 구별되어 존재하심으로써 세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the
Father)와 아들(the
Son)과 성령님(the
Holy Spirit)으로 존재하십니다. 아버지도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세분만이 본질상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인간과 자연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영원하신 절대자입니다. 다른 창조주는 없습니다. 본질(Essence)은 특정한 존재(being)로서 “나는 무엇(What)인가? 또는, "나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은 서로 다른 사람(Person, 개체)입니다. 사람은 본질(나는 무엇인가?)을 의미하지 않고 "다른 것과 구별된 개별적인 인격체" 를 의미합니다. 즉, “나는 누구(Who)인가? 나는 다른 사람과 구별된 개체다” 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예수님)과 성령님은 서로 다른 인격체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지만 세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세분은 한 하나님으로서 항상 함께 계시고 또, 항상 함께 일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타락한 인류를 위해 구원계획을 세우시고 아들(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요 3:16; 엡 1:4-10).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요 6:38-39; 히 10:10). 성령님은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믿는 자에게 적용시키십니다. 즉,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믿고 구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요 1:33; 행 2:33: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임). 그 세례를 통하여, 성령님은, 믿는 자(성도: 그리스도인)안에 들어 오시고 그 안에 영원토록 거주하시며(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그 성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전이 됨), 그의 보혜사와 인도자가 되십니다. 즉, 하나님이 믿는 자안에 영(Spirit)으로 들어 오셔서 내주하시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알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녀임을 알게 하셔서,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시고(성화),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도록 인도하십니다(요 3:5-8,
14:16, 15:26; 행 1:8; 롬 8:13-16, 15:16; 고전 3:16; 벧전 1:2).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면, 우리는 아들(예수님)을 영접해야 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우리는 또한, 성령님을 영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그처럼,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연이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요 20:22). 만일, 어떤 사람이(예를들어, 유대인이나 무슬림의 경우)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아들(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결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그에게 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아버지는 오직 아들(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마 10:40; 요 3:36; 6:40; 13:20; 요일 5:10). 그래서, 누군가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는, 예수님을 반드시 영접해야 합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연이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요 20:22).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반 동안 사역을 거의 마무리 하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 세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성령을
말함)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현재) 너희와 함께(beside: 옆에) 거하심이요 또 (장차) 너희 속에(in: 안에) 계시겠음이라(will
remain: 내주할 것임).”
이 말씀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기에, 성령이 그들 안에 임하실텐데,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 안에 영원토록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연이어 자신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말씀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때, 예수님도 함께 임하실 것임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도 우리 안에 함께
들어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사건은(성령 세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다시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은 항상 함께 하시고, 서로 내주하시기에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져서, 우리 안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일 누군가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지만,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요? 그는 분명 성령으로 말미암아(거듭난 후), 예수님을 영접했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성령으로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따르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타락한 육신(옛사람)의 소욕을 이길 수 없기에, 혼(soul)이 성화되지 못하고, 또,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하기에, 예수님의 담대한 증인으로 살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행 1:8). 그래서, 구원을 받되 부끄러운 구원을 피하기 힘들 것입니다(고전3:15). 그처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은 서로 다른 별개의 일로서 결과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에, 전심으로 기도하여 반드시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행 1:13-14;
2:4).
7.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방언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았슴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 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이르러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몸소 느끼며),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방언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최초의 외적인 현상입니다(요엘 2:28; 행 2:4, 10:46, 19:6). 여러분도 성령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말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고넬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넬료는 사도 베드로를 초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는데, 그들이 복음을 들을 때, 오순절 때와 같이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행 10:44-47). 에베소의 제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행 19:6). 에베소의 제자들은 사도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물세례를 받았는데, 사도바울이 안수를 하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그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그것을 볼 때, 믿는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처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 방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은 성령세례를 받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외적인 증거이고,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만(고전 14:5, 18, 39), 방언은 실상 성령의 여러가지 은사들(선물) 중의 하나입니다(고전 12:8-11 성령의 아홉가지 은사: 1) 지혜의 말씀, 2) 지식의 말씀, 3) 영분별, 4) 믿음(특별한 믿음), 5) 병고침, 6) 능력행함(귀신을 쫒아 내는 일등), 7) 예언, 8) 방언, 9) 방언 통역). 또,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 지면, 우리에게는 내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어 집니다(벧후 1:4: 롬 8:29).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갈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아홉가지). 그러나, 그 아홉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사랑이 나타나면 희락이 나타나고 화평도 나타나고 다른 열매들도 동시에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fruit)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슴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내적 증거)입니다.
8.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 세례를 받은 후부터는, 성령 충만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고(행 4:8, 31), 성령 세례에 대해서는 다시금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성령 세례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 처음으로 성령으로 채워진 상태(Initial filling), 즉 최초의 성령충만으로 여겼기 때문이고(성령 세례는 최초의 성령 충만임),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 세례가 한번 임하면 성령이 그 안에서 영원토록 내주하기 때문입니다(요 14:16-17; 행 29:2; 고전 12:13). 즉, 성령 세례는 개개인에게 1회적인 사건으로서, 성령 세례가 임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 오셔서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늘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 세례를 받은 후부터 항상 성령의 충만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매일 매일 말씀과 기도와 감사와 찬양과 순종을 통하여 주님과 늘 교제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엡 5:18-21; 갈 5:24).
9. 성령 세례를 받은 후의 제자들의 삶의 변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고 난 이후부터 종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고, 늘 모이기에 힘쓰며 예배를 드렸고, 서로 교제하며 말씀을 배우며, 기도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였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과거의 연약했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확고한 증인이 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세례는 구약시대와 오순절이전의 성령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각각 성령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각각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성령 충만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것처럼, 우리도 성령 충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았슴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령충만을 유지해야 할까요? 그것은, 성령 세례가 최초의 성령충만을 의미하는 것이지, 지속적인 성령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아닙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았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알게 모르게 근심하게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근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성령님을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기에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살면 기뻐하시지만, 우리가 불순종하면, 성령님은 근심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번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동적으로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죄를 짓지 말고 선행을 하라고 말하면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고 권면한 줄 믿습니다(엡 4:25-30).
…. 엡 4:30 ...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고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근본적인 비결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일입니다. 마치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았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말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핍박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예수님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기 위해, 항상 전심으로 기도했고, 그 결과, 성령으로 충만해 졌기에 그들은, 맡은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행 4:29~31).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성령을 구하고, 충만함을 받아야만 하는 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고, 충만함을 유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함입니다(행 1:8).
그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 먼저는,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하시고, 그 다음엔, 성령 세례를 통하여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고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세례를 받고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여 우리의 혼(soul)과 생각(mind)의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결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강림사건은, (종전에 계신 성령님의 사역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서),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전면에 등장하시면서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일은, 사도행전 1:8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사건입니다. 과거에 이미도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랐지만, 여전히 연약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성령의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담대한 증인들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해서 반드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성령을 받는 일에는 별도의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눅 11:13).
또, 성령 세례를 이미 받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함을 유지해서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heart)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엡 5:18-21).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이고 본분이고 축복입니다.
….엡 5:18-21…"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heart)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셨다면, 오순절의 제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성령 세례를 간절히 사모하고 전심으로 기도함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시고, 또, 매사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며(롬 8:4),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고자료 첨부>
1. 거듭남과 믿음의 관계 이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9QYU1ITjh56H0_JSMcAfTmJ7QSEbs_Ce/view?usp=sharing
2. 거듭남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의 차이:
아래의 링크(제목: "신앙생활의 실패요인과 해결책")를 클릭하신 후, 중간 지점에 가시면, 위의 제목("거듭남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의 차이")의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05/spirit.html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CaJjsJvfmuwZhUAd5X7BvgxayLMdatjb/view?usp=sharing
4. 요한복음 14:16-23 "성령 세례를 받으라(2)"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LgqOd0QHw8F_eW7VGMrNm6YqfTkcwAs-/view?usp=sharing
5. 사도행전
2:38-39 "성령 세례를 받으라(3)"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PDtaMwIjje5ot9D8DjU4ywMmOsWULOhG/view?usp=sharing
6. "성령 세례의 중요성"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c-O1yx2YoZ362r48nkFHj30wHqMSpm37/view?usp=sharing
7. 거듭남/성령세례와 관한 비성경적 주장에 대한 비교 검토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in
Korean, 한글)
https://drive.google.com/file/d/1TiSyMBfzHJTYqAXUM_ez_MCGIdPXhXSu/view?usp=sharing
(in English, 영어)
https://drive.google.com/file/d/1UIih6gXM8roiNoRL1qrMD3oMtRt7j2A4/view?usp=sharing
8. 어떻게 우리의
영을 훈련시킬 수 있는가? (by Kenneth E. Hagin)
https://drive.google.com/file/d/12H88nUFbOjKlUYdACso_j2-FPJBWnHHy/view?usp=sharing
9. (책) 이것이 성령세례다 (저자: 이화영 목사):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3/05/7.html
*(책)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방법 (저자: A. W. Tozer):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3/05/8.html
10.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가? by 케네스 해긴
* 한글 & 영어 (영어 텍스트는 한글 텍스트의 마지막에 놓여 있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부흥의 길" (The Way to Revival) by 마틴 로이드 존스 (Martin Lloyd-Jones):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DrL6XP1qBnnQzRtJtnVgw0LJOCNfbPkq/view?usp=sharing
<안내>:
이 웹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이 11가지 제목의 글이 들어 있습니다. 각 제목 아래에 있는 웹사이트를 직접 클릭하시면 글을 바로 열 수 있으니 클릭하셔서 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11.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20/01/11.html
10. 하나님의 자녀로의 거듭남, 성령의 세례와 충만: (이 페이지임)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20/01/10.html
9.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20/01/9.html
8. 우리는 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가?: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20/01/8.html
7. 악의 문제: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20/01/7.html
6. 종말을 대비하십시오(첨부: 요한계시록 요약, 도표):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20/01/6.html
5.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20/01/5.html
4.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20/01/4.html
3.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20/01/3.html
2. 모든 종교가 다 구원을 보장할까요? (첨부: 종교 비교표):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20/01/2.html
1.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https://blessednews.blogspot.com/2013/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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